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티베트 불교 (문단 편집) === 인적ㆍ사상적 교류 ===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456|허일범, 《한국 불교 속의 티베트불교》]] 한국 불교와 티베트 불교의 교류는 [[통일신라]]부터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특히 티베트 불교를 숭앙하던 몽골의 침략 이후 고려 불교에 일정 부분 영향을 준 바 있다. '''1. 통일신라시대''' * [[신라]]승 김무상(金無相, 684-762)과 티베트 사신 바상시가 만난 일화는 삼예사(寺)의 사지(寺誌)에 해당하는 《바세》에 기록되었다. 《바세》에 따르면 김무상은 [[경덕왕]] 13년(754) [[당나라]] [[장안]]에서 티베트 사신들을 만나 "인도불교가 티베트에서 주류를 이룰 터인데, 훗날 티송데첸 왕이 등장하여 불교를 널리 홍포하리라"라고 예언하였다.[br]또한 김화상은 사신들에게 《십선경》, 《금강능단경》, 《도간경》을 전해주면서 왕의 즉위시에 사용하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훗날 김무상의 예언은 적중하여 샨타락쉬타가 인도에서 들어와서 티베트에 불법을 홍포했고, 티송데첸 왕이 즉위할 때에는 사신들이 전수받은 세 종류 경전을 독송하여 신심을 일으켰다.[br]김무상의 법호와 법명은 정중무상(淨衆無相)으로 주로 사천(四川) 지방에서 활동했고 말년에 정중사(淨衆寺)에 주석(主席)했다. 그는 중국 선종 동산법문(東山法門)의 분파인 정중종(淨衆宗)의 개조(開祖)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중국 선불교가 티베트에 영향을 미친 사례 중 하나로 김무상의 일화를 언급하기도 한다. * 《금강삼매경》은 신라 찬술설이 제기되는 경전으로[* 중국 삼계교(三階敎)에 의한 찬술설, 혹은 삼계교를 믿는 신라인 승려에 의한 찬술설도 제기되었다.], 중국 초기 선종 성립에도 영향을 준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금강삼매경》은 티베트에 족첸 전승을 도입한 인도의 학승이자 요기(yogi)인 비말라미뜨라(Vimalamitra)의 저술로 알려진 《돈입수의(Cig car ’jug pa'i rnam par mi rtog pa’i bsgom don)》에도 인용되어 돈오를 정당화하는 전거로 활용되었다. 만약 신라 찬술설이 사실이라면, 김무상의 일화와 더불어 당시 한반도~중앙아시아 간 활발한 문물 교류를 짐작케하는 사례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br]《돈입수의》에서의 선정ㆍ지혜바라밀 및 수소성혜(修所成慧)의 강조는 삼예논쟁 당시 까말라쉴라의 논적이었던 마하연 화상의 돈오론을 연상케 하지만, 한편 비말라미뜨라의 또다른 저서인 《점입수의》에서는 대비심과 보시 등의 방편을 강조하였고 《돈입수의》와 《점입수의》의 본문 중《수습차제》와 동일한 부분이 존재하는 등 비말라미뜨라와 까말라쉴라 간의 사상적 유사성도 찾아볼 수 있다. [[https://m.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45509|박운진, 《비말라미뜨라(Vimalamitra)와 삼예(bSam yas) 논쟁》]] * 혜과(惠果) 화상의 제자인 신라의 오진(悟眞)은 인도로 구법순례를 떠났다가 귀로에 티베트에서 입적하였다. * 통일신라시대 고승 원측(圓測)의 《해심밀경소》를 법성(法成, Chos grub)이 티벳어로 번역하여 티베트 대장경에 수록되었다. 이후 원측의 저서는 티베트 불교 내에서 경전 해석의 주요한 논거가 되는 대표적인 논장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2. 고려시대''' * [[고려]] [[충렬왕]] 20년(1294) 티베트 승려 절사팔(折思八)이 티베트 경전과 법구류를 가지고 고려에 들어왔다. * [[충선왕]] 즉위년(1298)에는 충렬왕과 충선왕, [[계국대장공주]] 등이 티베트 불교 승려에게 보살계를 받았다. * 고려인 출신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출가하여 티베트 불교 승려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황실의 각별한 존숭을 받았으므로 고려에 있는 가족에게는 특별한 우대 조치가 베풀어졌다. * [[충숙왕]] 1년(1314)에는 홍약이 티베트 경전 1만 8천여 권을 고려에 전해주었다. * 《[[고려사]]》에 따르면 충숙왕 7년(1320)에는 몽골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티베트로 들어가게 된 충선왕을 위하여 민천사(旻天寺)에서 기도법회를 열었다고 한다.충선왕은 1320년 [[원인종]] 아유르바르와다가 사망한 후 환관 임백안의 참소로 인해 불경을 공부하라는 명목으로 티베트에 3년 간 유배된다. 충선왕의 유배지는 당시 티베트의 정치ㆍ종교적 중심지였던 사캬의 사캬 사원이었다. 지금까지 현지에선 충선왕과 그의 아들에 대한 일화와 함께 충선왕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는 탕카가 전해진다. || [youtube(x-imINF36XA)] || || KBS HD 역사스페셜《고려 충선왕, 티베트로 유배된 까닭은》[* 썸네일에 나온 탕카 속 원(元)의 제후 복장을 한 인물이 충선왕일 것으로 추정된다.] || * 현재 우리나라 불교에 널리 퍼진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도 티베트의 자사태마(刺思駄麻)와 사팔자(思八刺) 라마가 전한 것이다.[* 출처: 《성관자재구수육자선정》. 당대 원나라의 한자식 인명 표기를 고려하면, 여기서의 자([[刺]])는 자형이 비슷한 랄([[剌]])의 오기로 추정된다. 剌자는 '라(la)'를 음차하기 위해 자주 쓰인 글자였다.] 이처럼 원 간섭기에 원나라 황실에서 신봉하던 티베트 불교가 고려에 유입되었으나, 티베트 불교의 신도층은 고려의 왕비가 된 원나라 공주의 수행원들과 고려에 거주하는 몽골 관인들 위주로 한정되었다. 고려에서의 티베트 불교 수용은 황실에 대한 존중과 공주에 대한 배려의 성격이 강했으며 전체 고려 불교계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다만 원나라 황실을 축원하는 법회의식 등을 통하여 티베트 불교의 의례와 불상, 불구(佛具) 등이 수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11_0050_0020_0020_0020|최연식, 《한국문화사 11.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이후 [[공민왕]]의 반원 정책으로 친원 세력이 축출되면서 티베트 불교 역시 자취를 감추게 된다. '''3. 조선시대''' >안노생(安魯生)이 말하였다. >"황제가 불법(佛法)을 숭상(崇尙)하여 중[僧]이 서역(西域)에서 왔는데, 나이가 20여 세쯤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존경하고 떠받들어 ‘생불(生佛)’이라고 하는데, 그 언행(言行)을 들어 보면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고, 구운 양(羊)고기를 잘 먹습니다. 그러나 밤중에 등불과 같이 방광(放光)하는데, 이것이 이상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킵니다." >---- >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3월 15일 기사 4번째 기사 >예부(禮部)에서 이래(李來)·맹사성(孟思誠)·설칭(薛偁)·이회(李薈)로 하여금 영곡사(靈谷寺)에 나아가서 각각 황제가 지은 찬불시(讚佛詩)를 속운(續韻)하여 올리게 하였다. [...] > >이때에 호승(胡僧) 갈니마(曷尼摩)가 있어 ‘생불(生佛)’이라고 하는데, 황제가 그를 맞아 경사(京師)에 데려다 영곡사에 거처케 하고, 매우 공경하고 믿으니, 조관(朝官)과 사인(士人)들이 모두 달려가서 이마를 땅에 대고 기(記)를 받았다. >----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 4월 2일 경진 13번째 기사 《[[태종실록]]》에는 [[영락제]]가 숭상했던 대보법왕(大寶法王) 제5대 까르마빠 데신 셱바(de bzhin gshegs pa)[* 명(明)의 황제들은 까규, 사캬, 겔룩의 지도자들에게 각각 대보법왕(大寶法王), 대승법왕(大乘法王), 대자법왕(大慈法王) 등의 법왕 칭호를 하사하며 국사(國師)로 대우하였다. 이 중 까르마 까규의 수장 까르마빠에게 수여된 대보법왕의 서열이 가장 높았다. 명의 티베트 불교에 대한 존숭에는 원(元), 청(淸)이 그러했듯 종교적 이유 뿐 아니라 이민족인 티베트를 통제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락제는 티베트 불교 내 다른 종파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까르마빠가 속한 까르마 까규를 선양한다는 명목으로 티베트에 군대를 파견하고자 했으나, 제5대 까르마빠는 다양한 종파의 필요성을 설파하며 영락제의 제안을 거절한다. 덕분에 명대(明代) 300년 가량 티베트는 중원의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원대(元代) 싸꺄의 지도자였던 도괸 최걀 팍빠 역시 서로 다른 근기와 성향을 가진 중생들을 위해 다양한 종파들이 필요함을 쿠빌라이 칸에게 역설한 바 있다).][* 명대(明代) 이전에는 원(元) 세조(世祖) [[쿠빌라이 칸]]이 사꺄의 지도자 도괸 최걀 팍빠(ʼgro mgon chos rgyal ʼphags pa)에게 '대보법왕'(大寶法王)이란 칭호를 봉한 바 있다. 이후 '대보법왕'은 티베트 불교 지도자를 지칭하는 중원의 칭호 중 가장 존숭받는 칭호가 되었다. 명대에 이르러서는 영락제가 원 세조의 선례를 따라 제5대 까르마빠 데신 셱빠에게 대보법왕 칭호를 수여했다. 청대(淸代)에는 겔룩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나 빤첸 라마도 세간에서 '대보법왕'이란 칭호로 일컬어졌다. 각 종파의 지도자가 '대보법왕'으로 일컬어진 시기(사꺄-까르마 까규-겔룩 순)와 해당 종파가 종교적, 세속적 권력의 우위를 점했던 시기가 대략 일치한다. 현대 중화권에서 '대보법왕'은 주로 까르마 까규의 지도자인 까르마빠를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명나라|명]](明)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안노생(安魯生)은 [[태종(조선)|태종]]에게 영락제의 초청을 받은 한 서역(西域)의 [[승려]]에 대해 언급하였다. 비록 제5대 까르마빠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연대(年代)와 승려의 나이, 출신지, 명성, 풍습 등의 묘사를 통해 제5대 까르마빠임을 유추할 수 있다.[* 제5대 까르마빠는 1403년 영락제의 초청으로 티베트에서 출발하여 1407년에 이르러서야 난징에 도착하는데 그 때 그의 나이 만 23세였다. 안노생은 1406년 명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1407년 조선으로 돌아온다.] 안노생은 까르마빠에 대해 "그 언행을 들어보면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인색한 평가를 내리면서도, 한편으로 까르마빠가 보여준 방광(放光)의 이적(異跡)을 소개하였다. 《황명종신록(皇明從信錄)》등의 명대 사서(史書)들도 까르마빠가 보인 이적을 기록하였다. 또한 명나라에 파견된 이래(李來), [[맹사성]](孟思誠), 설칭(薛偁), 이회(李薈) 등 조선 사신들이 당시 제5대 까르마빠가 머물던 [[난징]]의 영곡사(靈谷寺)에 방문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사신들은 예부(禮部)의 지시로 영곡사에 가서 황제가 직접 지은 찬불시(讚佛詩)를 속운(續韻)하여 올렸다. 찬불시에는 불가적(佛家的) 구도(求道)와 깨달음에 관한 내용과 함께 전법행(傳法行)을 펼치는 까르마빠를 찬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영락제의 찬불시 전문(全文)이 태종실록 동일 기사에 수록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804002_013|#]]] 또한 사신들은 영곡사에서 까르마빠가 명나라의 조관(朝官), 사인(士人)들에게 마정수기(摩頂授記)를 주는 모습을 목격하였거나 혹은 사신들 스스로 까르마빠를 친견하고 마정수기를 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실록 원문의 '마정수기언'(摩頂授記焉)을 '이마를 땅에 대고 기(記)를 받았다'라고 옮긴 국사편찬위 조선왕조실록 DB의 번역은 명백한 오역으로 사료된다. '마정수기'(摩頂授記)란 부처가 제자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미래세에 성불(成佛)할 것을 예언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고유 명사를 일반 명사처럼 풀어 해석하는 오류는 실록 번역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문제점 중 하나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조선왕조실록#s-7.3|번역의 문제점]] 문단 참조.][* 실제 까르마빠가 마정수기(摩頂授記)를 주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티베트 불교에 마정수기를 주는 의례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설사 까르마빠가 생불(生佛)의 자격으로 마정수기를 준다 하더라도 일반 대중들에게 무분별하게 수기를 내릴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마정수기는 부처가 보살의 정수리를 만지며 미래세(未來世) 성불(成佛)을 알려주는 예언적 행위이며, 수기를 줄 때 보통 성불하는 시기와 성불 후 갖게 되는 부처의 명호(名號), 불국토의 이름, 수명, 권속 같은 자세한 사항도 함께 일러주는 경우가 많다. 티베트 불교에도 간혹 스승이 제자의 성취를 예언하는 일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뛰어난 근기를 가진 제자에 한정된다.[br]이는 라마(lama)들이 상대방의 이마에 자신의 손을 대어 가피를 주는 일상적인 행위로서 '손으로 주는 관정'이란 뜻의 착왕(phyag dbang)을 동아시아의 불교 상식에 의거하여 마정수기로 해석한 것이라고 짐작된다. 《열하일기》에도 빤첸 라마가 그를 친견한 자의 이마에 손을 대어준다는 설명이 등장하며, 현재까지도 린뽀체들은 머리를 조아려 예를 표하는 신도들에게 답례처럼 착왕을 주곤 한다(심지어 '발로 주는 관정'이란 뜻의 샵왕(zhabs dbang)도 있는데, 가령 대중이 너무 많이 운집한 경우 고승이 대중들 위를 걸어가며 발로 가피를 줄 때도 있다). 착왕에는 마정수기처럼 미래세에 결정코 성불한다는 예언의 의미는 없다. [[티베트 불교#s-5.5|밀교의 수행 요건]] 문단에서 서술하였듯이, 티베트 불교 문화에 익숙치 않은 동아시아에서 관정이나 착왕을 마정수기로 착각하는 일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종종 반복되고 있다.][* 실록에 등장하는 조관(朝官)과 사인(士人), 즉 관료와 관직이 없는 지식인들이 명나라 사람인지 조선 사절단인지 여부는 실록의 문장만으로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실록의 전후 기사에도 상황을 유추할만한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br]다만 조선 사대부들의 배불적(排佛的)인 성향을 고려하면 명의 관료, 지식인들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또한 '조관과 사인이 모두 달려갔다'(朝官士人皆奔趨)는 문장에 쓰인 '분추'(奔趨)란 표현은 '분추경리'(奔趨競利)라는 사자성어가 있듯, 이익을 위해 권력자의 거처를 분주히 드나드는 모습을 묘사하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표현이다. 따라서 실록의 해당 문장은 조선 사절단의 행적을 묘사한 문장이라기보다는, 황제의 공경과 믿음에 편승하여 까르마빠와의 친교를 바라던 당시 명나라 지배층의 세태를 묘사한 문장에 더 가깝다고 짐작된다.[br]그러나 한편으로 억불(抑佛) 정서가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조선 초기란 점, 황제의 의사에 민감한 사절 신분이라는 점, 조선 사신들이 예부(禮部)의 명으로 두 차례나 어제(御製) 찬불시(讚佛詩)를 차운(次韻)하여 올렸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조선 사절단을 지칭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신대승(申大升)은 말하기를, >"건륭(乾隆) 때에는 두려워 한 것이 몽고(蒙古)였었으므로 반선(班禪)을 총애하여 대우한 것은 그가 몽고 사람이었기 때문에 후하게 대우한 것이지 참으로 총애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정조실록 11권, 정조 5년 4월 8일 신해 1번째 기사 >몽고의 48개 부락의 사람들은 모두 사나운데 근래에 와서 더욱 강성해지자 황제가 늘 견제하면서 만족·한족과 같이 벼슬을 시키고 몽고의 왕이 새로 즉위하면 공주(公主)를 시집보냅니다. 그곳의 풍속은 번승(番僧)을 가장 존경하여 마치 신명(神明)처럼 공경하기 때문에 몽고인으로서 라마승이 된 사람은 서울에 있는 사찰을 주관하도록 하였으며 몽고 사람들이 숭배하는 번승이 있으면 대뜸 존경의 예를 더합니다. 연전에 반선(班禪)이 입적(入寂)한 뒤에 몽고의 여러 부락들 가운데 칸왕(汗王)의 자제들로써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종파를 차지하려고 꾀하는 자가 있어서 황제가 유시를 내려 금지하였습니다. 이를 가지고 보면 반선을 파격적으로 존경하여 받드는 것도 오로지 그 불도를 독실히 믿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열하(熱河)에 해마다 거동하는 것은 아마 숨은 뜻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 >정조실록 39권, 정조 18년 3월 24일 신해 3번째 기사 1780년([[정조(조선)|정조]] 4년),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의 사절단과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 제6대 빤첸 라마 롭상 빨덴 예쉐(blo bzang gpal ldan ye shes)[* '반선액이더니'는 [[강희제]]가 제5대 빤첸 라마에게 수여한 칭호로, 역대 빤첸 라마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반선'은 빤첸 라마의 '빤첸'이라는 티베트어('학자'를 뜻하는 산스끄리뜨어 '빤디따'(paṇḍita)와 '위대한'을 뜻하는 티베트어 '첸모'(chen mo)의 합성어), '액이더니'는 몽골어 단어를 그대로 빌린 만주어로 '보배'(珍寶)를 뜻하는 '에르데니'(erdeni)를 각각 음차(音借)한 한자어이다.]와의 조우가 열하(熱河)에서 이루어진다. 건륭제와 그의 신하들은 조선의 사신들이 황제의 스승인 [[판첸 라마|빤첸 라마]]에게 예를 표하기를 원했으나, [[숭유억불|억불]](抑佛) 정서가 지배적인 조선 후기의 통념상 명분에 어긋나는 굴욕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져 사절단 내부의 반발이 극심했다고 전해진다. 빤첸 라마는 사절단에게 목조 불상(佛像)을 하사하였으나 이후 불상의 행방은 묘연하다. 사절단의 정사(正使)인 8촌형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했던 [[박지원(실학자)|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의 《[[열하일기]]》에 관련 일화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당시 청, 몽골, 티베트 간의 국제 관계를 알려주는 중요 사료로 취급된다. 또한 《[[정조실록]]》에도 빤첸 라마와 관련한 조선 사신들의 국제 정세 분석이 수록되어 있다. 빤첸 라마에 대한 청의 파격적인 존숭을 단순히 신앙심의 발로(發露)로만 볼 수 없으며,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몽골을 포섭하고 회유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담겨있다는 점을 조선 사신들은 정확하게 간파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